소설 소녀경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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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장]




지원은 다시 자리에 앉아 책갈피한 소녀경을 펼쳤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고르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고 단정한 목소리였다.




"後庭探珠(후정탐주)..."




짧은 숨을 섞으며 다음 줄을 이었다.




"逆流而上(역류이상)..."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조심스레 내뱉었다.




"幽谷迴春(유곡회춘)..."




지원은 시선을 글자 위에 고정한 채 한 자 한 자 되새기듯 해석을 뱉어냈다.




"뒤뜰에서 구슬을 탐하면서 흐름을 거스르며 올라가니 깊은 골짜기에 봄이 돌아오도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를 떨림이 섞여 있었다.




"뒤뜰"이라는 말 속에 담긴 은유는 명백했고 "구슬"은 감각의 중심이자 욕망의 상징이었으며 "거슬러 오른다"는 것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길을 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내했을 때 비로소 "깊은 골짜기", 즉 폐쇄된 감각의 공간에 생명이 돌아온다는 것.




지원은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해석이 끝났지만 그 말들은 그녀의 내면에서 여전히 진동하고 있었다.




그곳을 열어주는 일. 거슬러 침투하는 일. 그리고 그 끝에서 무언가 되살아난다는 상징.




이것은 단순한 성적 결합이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지켜온 자기 몸•자존감•경계심•수치심 등 그 모든 것을 통과해야 도달할 수 있는 장소였다.




"정말로 그 끝에 봄이 올까?"




지원은 손끝으로 책장 모서리를 문질렀다.




책상 위에는 아까부터 펼쳐놓았던 두 권의 책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왼쪽에는 동의보감(東醫寶鑑). 오른쪽에는 옥방비결(玉房秘訣)




둘 다 그녀가 미리 표시해둔 책갈피에서 벌어진 채 잔잔한 긴장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지원은 의자에 등을 기대지 못한 채 허리를 살짝 숙여 동의보감 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손가락이 활자 사이를 따라가며 입술 사이로 천천히 고전의 문장을 끌어냈다.




"男逆女肛(남역여항)...如龍反淵(여룡반연)...氣通九竅(기통구규)...乃達至境(내달지경)..."




짧은 숨을 고르곤 낮게 우리말로 옮겨 읽었다.




"남성이 여자의 항문으로 역행하면 용이 깊은 연못을 거슬러 도는 것 같고 기운이 아홉 구멍을 통해 흐르며 마침내 지극한 경지에 이른다."




말이 끝난 순간, 그녀의 손끝이 책장 모서리를 덜컥 움켜쥐었다. 작은 한기 같은 것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왔다.




"여자의 항문으로 역행한다..."




그 표현은 오래전 고전 속 말인데도 너무 노골적이었다. 읽고 해석해놓고도 자신이 그 문장 속 "여자"라는 사실이 더할 수 없이 적나라하게 다가왔다.




"용이 연못을 거슬러 오른다..."




그 우아한 비유조차 지금의 그녀에게는 감각의 폭력처럼 느껴졌다. 그 의미는 강하게 침투하고 진동하는 압력의 연속이었다.




"기운이 아홉 구멍을 통해 흐른다"는 말에 이르자 지원은 저도 모르게 몸을 한 번 움찔했다.




그것은 자신의 몸 전체가 통제 불가능한 감각에 휩싸이고 스스로조차 제어할 수 없는 흥분에 빠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아홉 구멍...내 전신이 무너지는 순간을 뜻해."




지원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어서 오른쪽 옥방비결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이번에도 또박또박 읽었다.




"後庭之合(후정지합)...非信極不爲(비신극불위)...逆天而得道(역천이득도)..."




곧이어 지원은 다시 우리말로 옮겨 읽었다.




"뒤뜰의 결합은 신뢰가 극에 달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고 하늘을 거슬러 도를 얻는다."




또 한 번 손끝에 미세한 떨림이 번졌다.




"신뢰가 극에 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그 말은 너무나 직설적이었다.




지금까지 실증도 어렵고 당혹스러웠지만 이 체위는 오로지 둘 사이에 절대적인 신뢰가 없다면 허용될 수 없는 행위라는 뜻이었다.




그만큼 깊숙하고 민감하며 감정적으로 위험한 위치.




그리고 마지막 구절.




"하늘을 거슬러 도를 얻는다."




그녀는 그 말 앞에서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것은 단순한 성(性)이 아니야.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일지도 몰라."




지원은 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얼굴을 붉혔다.




아니, 붉혔다기보단 견딜 수 없이 부끄럽고 두려웠다.




지원은 펜을 들어 책상 위 옥방비결의 한 구절에 조심스레 줄을 그었다.




非信極不爲.




그녀는 밑줄을 긋고 나서 문장 오른쪽 여백에 작은 별표 두 개를 그려 넣었다.




지금까지 어떤 고서에도 그런 표시를 한 적은 없었지만 이 구절만큼은 예외였다.




이것은 단순한 학문적 메모가 아니었다. 그녀의 두려움이자 유일한 기준선이었다.




"정말 이것이 왜 중요한지 이제야 몸으로 이해가 돼."




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손가락 끝으로 "信"이란 글자를 천천히 따라 문질렀다.




그 한 글자가 지금 자신에게는 실증 전체를 떠받치는 버팀목처럼 느껴졌다.




만약 상대가 조금이라도 강하게 밀어붙였을 때, 아니면 그의 눈빛에서 망설임이 아닌 소유의 기색이 느껴진다면...




그 순간, 그녀의 몸은 얼어붙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더 깊이 닫힐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 사람을 의심하게 되면..."




봉래역주는 단순한 체위가 아니었다.




자신의 가장 폐쇄된 곳을 열어주는 행위. 몸의 중심을 넘어 감정의 깊숙한 결을 상대에게 위임하는 일.




거기에는 통증도 따르고 불쾌감도 따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행위 도중 "내가 지금 이용당하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신뢰가 없으면 그 순간은 단순히 "실증 실패"가 아니라 영혼의 균열이 되는 일이다.




그녀는 이마를 짚었다. 실증은 한 번뿐이지만 그 충격은 잘못하면 영원히 각인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억지로 밀어붙인 적이 없었다.




늘 조심스럽게 손을 대고 눈빛으로 허락을 구했고 끝난 뒤에는 자신보다 더 먼저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잖아."




그 믿음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 신뢰가 극점에 이를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 문도 열 수 있을지 모른다.




지원은 다시 옥방비결을 바라보았다. 별표 옆에 조심스럽게 작은 글씨로 한 줄 적었다.




"내가 그분을 믿는다면 이것은 가능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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