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녀경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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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장]




조교실 책상에 앉아 자료를 정리하던 지원의 휴대 전화로 진동이 울렸다.




액정 화면에서 승호라는 이름을 확인한 뒤 지원은 잠시 숨을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네. 교수님."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근은 잘 했어? 내가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서 출근이 힘들 것 같구나."




지원은 자세를 바로 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많이 안 좋으세요?"




"괜찮아. 괜찮아."




승호의 대답은 짧았지만 어딘가 힘이 빠진 기색이 묻어 있었다.




지원은 책상 위에 놓인 종이컵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침은 드셨어요?"




"응. 덕분에 잘 먹었어. 고맙다."




그 말에 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이어진 말에는 평소보다 진지함이 배어 있었다.




"요즘 안색이 좀 많이 안 좋으세요."




전화기 건너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곧 승호의 목소리가 조심스레 이어졌다.




"걱정하지 말고 어제 실증한 내용이나 잘 정리해두게."




지원은 작게 "네." 하고 대답하며 휴대 전화를 귀에서 내렸다.




통화가 끝났지만 그녀의 눈은 잠시 멍하니 책상 위에 머물러 있었다.




사제 간의 대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이 오래도록 울리는 듯했다.




한편, 통화를 마친 승호는 서재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방 안에는 아직 햇빛이 들지 않았고 탁자 위 스탠드 조명이 책상 위에 둔 오래된 문서를 뚜렷이 비추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누렇게 바랜 노트 한 권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는 소녀경에서 정리한 체위 목록이 정갈한 한자와 한글로 줄지어 적혀 있었다.




그는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펜을 손에 든 채 한 줄 한 줄 목록을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침묵 속에서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앵무합련•유수탐앵•월영포수•등화가친•쌍앵상주 항목 옆에 작고 단정한 글씨로 "완료"라 적었다.




곧이어 대면합규 항목 옆에 "작성 중"이라고 적었다.




잠시 펜을 멈춘 그는 깊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살짝 들어 책장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오래전부터 정리해온 필사본들과 참고 서적들이 꽂혀 있었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그 어떤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내려 생략된 항목들을 빠르게 훑었다.




화중첩영(花中疊影)•사자포산(獅子抱山)•교봉상응(交蜂相應)•용교호접(龍交蝴蝶)•전음상합(傳陰相合)•선기풍연(仙騎風輦)




체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판단을 내리는 그의 눈빛은 예민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잠시 주저한 뒤 신중하게 그 옆에 "생략"이라 적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시선을 멈춘 두 항목 앞에서는 유독 망설임이 길었다.




풍접화심(蜂蝶花心)




그 옆에 그는 천천히 "필요"라고 적었다.




그리고 아래에 쓰인 봉래역주(鳳輦逆走).




그는 이 항목 앞에서 한참 동안 펜을 들고 움직이지 않았다. 눈가에는 피로가 겹쳐졌고 미간에는 생각의 주름이 더 짙어졌다.




펜을 내려놓은 승호는 여전히 펼쳐진 목록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눈은 그 문자의 윤곽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손끝이 종이 위를 천천히 훑었다. 봉래역주라는 세 글자가 마치 고해성사의 문장처럼 무겁게 가슴에 얹혀 있었다.




지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안색이 점차 새하얗게 변하는 그녀의 모습.




얼굴 근육이 일그러지며 입꼬리가 비자연스럽게 올라가는 그녀의 모습.




눈동자가 확장되며 시선이 초점을 잃어가는 그녀의 모습.




눈물이 광대뼈를 타고 떨어지는 그녀의 모습.




발가락이 오므라지는 그녀의 모습.




손가락이 바닥을 할퀴다가 갑자기 경련처럼 오그라드는 그녀의 모습.




갑자기 상체가 앞으로 굽히면서 골반이 뒤틀어지는 그녀의 모습.




무릎이 바닥에 부딪히며 몸 전체가 경련하듯 떨리는 그녀의 모습.




승호는 이마를 감싸쥐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뇌리에 남아 있는 그녀의 표정을 밀어내려 해도 그것은 자꾸만 떠올랐다. 마치 눈꺼풀 안쪽에 새겨진 상흔처럼.




"진짜 선을 넘는가..."




목록을 바라보는 눈이 흐려졌다. 괴로웠다.




죄책감은 너무나 생생했고 그것은 단지 노쇠한 남자의 욕망이라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목소리가 그의 안쪽에서 몸부림쳤다.




승호는 오랜 망설임 끝에 그 옆에 "필요"라는 단어를 적었다. 곧이어 오른편 여백에 작게 덧붙였다.




후정교(後庭交)




그 단어는 그의 펜 끝에서 마치 눌러쓴 듯 적혀 나왔고 다 쓰고 난 후에도 그는 한참 동안 그 단어를 내려다보았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은 서재 안 노인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하지만 곧 PC에서 이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하면서 중얼거렸다.




"궁극의 체위...끝을 봐야 하니까..."




그가 작성하는 이메일의 수신자는 후지이(藤井) 교수.




5년 전 일본에서 개최된 소녀경 학술 발표회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는 도쿄 대학 교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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