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녀경 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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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장]




그날 오후, 연구실을 나선 승호는 조용히 한의원 진료실 문을 열었다.




규태는 창가 쪽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고 승호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 있었던 모양이군." 규태의 눈빛은 한 번에 꿰뚫는 듯했다.




승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침상에 걸터앉았다.




규태가 진맥을 위해 그의 손목을 조심스레 잡았다. 이내 방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규태의 눈썹이 천천히 찌푸려졌다.




"기운은 분명히 잘 퍼졌어. 오장전생법이 자네 몸에 어느 정도 안착한 것은 맞네."




그의 손끝이 맥을 짚는 동안 승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뼛속까지 피로가 번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데..."




규태가 손을 거두며 고개를 저었다.




"초기 투여한 약제의 기운이 1/3 정도 감쪽같이 사라졌네. 이것은 단순한 흡수나 소진이 아니라 외부로 누출된 흔적이야."




"누출?"




승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가 흔들렸다.




"그렇지. 마치 자네 몸이 정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 같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한 채로."




규태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시 자네 또?"




승호는 입술을 다물었다. 지원의 숨소리. 미세하게 떨리던 몸. 실증의 순간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그 장면을 밀어내듯 고개를 저었다.




진맥을 마친 규태는 한동안 침묵했다. 손을 거두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자네. 정말 끝장을 보려는 모양이군."




승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상에 그대로 앉아 고개만 살짝 떨군 채였다.




규태는 침대 옆의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그 눈빛은 언젠가 고함을 질렀던 그날과는 달랐다. 




분노도 체념도 아닌 지독한 조심이었다.




"내가 자네한테 욕했었지. 그 아이한테 그런 짓 하는 것 보고 인간도 아니라고 했었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결국 이렇게 손을 보탰다는 것은 자네가 그만큼 절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규태는 승호의 손등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직도 손끝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 제발 조심하게.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자네 지금 정이 새고 있어. 몸이 바닥에서부터 텅텅 비어간다고."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다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 실증이 단지 연구를 위한 것이라면 그만두라고 말하겠네. 하지만 자네가 삶의 끝에 던지는 마지막 승부라면 내가 뭐라 하겠는가? 그렇다고 해도..."




규태는 말끝을 잘랐다. 이내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은 오래 이어졌다.




승호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규태를 바라보았다. 눈빛은 평온했지만 그 안에는 고집과 무언의 결의가 함께 숨어 있었다.




"어디까지 갈 것인가? 승호."




규태의 목소리는 이내 조용히 가라앉았다.




승호는 그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시선을 거두지 않고 규태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제90장]




"명심하겠네."




승호는 짧게 대답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낮고 무거웠다.




규태는 고개만 끄덕였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둘 사이에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승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나섰다.




복도를 따라 걷는 발걸음은 천천히. 그러나 주저함 없이 이어졌다.




승용차 운전석에 앉은 그는 시동을 건 뒤 브레이크를 밟고 천천히 도로로 진입했다.




오후 해가 기울고 있었고 차창 너머로 겨울빛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한 손으로 스티어링 휠을 감싸며 다른 손은 무릎 위에 느슨히 얹혀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잔잔한 클래식이 흘렀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뇌리에 규태의 말이 맴돌았다.




"정이 빠져나가고 있어. 오장의 기운이 새고 있다고."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눈 밑이 어두웠다.




그는 천천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승호는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그 단어를 흘렸다.




운전석 창 너머로 붉게 져가는 겨울 해가 눈가를 스치고 있었다.




봉래역주.




소녀경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체위. 일반적인 접합이 아닌 여성의 괄약근을 이용한 방식.




일상에서는 누구도 쉽게 드러내지 않는 가장 수치스럽게 여긴다고 여겨지는 부위를 활용하는 이 체위는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곳은 자발적으로 열기까지 가장 멀고도 먼 거리."




승호는 핸들을 천천히 돌렸다. 차가 정체 구간에 접어들며 속도가 줄었다. 브레이크를 밟은 발목이 살짝 저릿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실증은 단순히 체력만으로 버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전신의 근육을 고르게 긴장시켜야 하고 압력 조절을 극도로 섬세하게 유지해야 하며 무엇보다 상대와 호흡이 하나도 어긋나선 안 되는 고도의 밀착 체위였다.




그 이상으로 무서운 것은 지원에게 요구해야 할 감정의 깊이였다.




"그 아이가 과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녀는 지금까지 수많은 실증에 응해왔다. 부끄러움을 참고 고통을 견디고 때로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봉래역주는 다르다.




이 체위는 육체의 마지막 경계를 넘는 일일 뿐 아니라 심리적 방어선을 완전히 해제해야만 가능한 행위였다.




그녀가 느낄 수치심과 굴욕감과 공포감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정말 해낼 수 있을까? 나도...그 아이도..."




승호는 조용히 오른손을 무릎 위로 옮겼다. 손끝이 떨렸다.




지난 실증 이후 그의 몸은 뚜렷하게 쇠약해지고 있었다.




규태 말대로 정기의 일부는 이미 누출되고 있었고 오장의 기운도 회복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이 마지막 실증만 성공하면..."




지원의 논문은 완성된다. 후지이 교수에게 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악몽 같은 삶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를 얻을 수 있다.




"그 아이를 여기서 빼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끝까지 가야 해."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알고 있었다.




봉래역주는 그녀의 몸과 마음 어딘가를 되돌릴 수 없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생각에 승호는 핸들 위에 이마를 잠시 기댔다.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생각은 이미 실증 이후로 향해 있었다.




지원이 그날 어떤 얼굴로 자신을 바라볼지...




실증을 마친 뒤 그녀는 침대보 위에서 얼마나 오래 몸을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을 것인지...




그는 그 장면을 상상만 해도 숨이 막혔다.




"그 아이 울지도 못할 것이야."




지원은 언제나 그랬다. 실증을 마치고 나면 조용히 샤워실로 들어가 혼자 물을 틀어놓고 앉아 있었다.




기계처럼 차가운 물줄기 아래서 몇 분 아니 때로는 몇십 분을...




그조차 자신에게 들키지 않으려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던 그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체위가 문제다.




그것은 그녀에게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감정의 가장 깊은 층을 찢고 들어가는 행위가 될 것이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곳. 스스로도 만져본 적 없었을 법한 가장 밀폐된 감각의 영역.




그것을 열고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신체를 내어주는 차원을 넘어선다. 자존의 경계가 흔들릴 수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연구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말 괜찮을까?"




승호는 자신의 턱을 꾹 누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실증을 위해 스스로를 다잡으며 따라왔다.




실제로 여러 체위에서 뛰어난 감응도를 보였고 연구자들 앞에서도 침착하게 자신의 신체 반응을 진술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문적 통제"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봉래역주는 그 통제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당하는 순간, 자신이 무너졌다고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승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 실증이 끝나고 그녀가 눈을 돌리거나 말을 잃거나 심지어 다시 연구실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끝난 뒤 그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가벼운 통증이 심장 아래쪽에서 시작되어 천천히 번졌다. 규태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자네 지금 실험이 아니라 어떤 것을 증명하려 드는 것 같아."




실증이 끝난 뒤의 정적. 그리고 그 안에 남을 감정의 잔해들.




그 무게를 자신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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