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녀경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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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장]




점심 무렵 승호는 교정을 빠져나와 조용히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의 걸음은 느렸지만 익숙했고 차 안에 올라탄 순간 깊은 숨을 내쉬었다.




백미러에 비친 눈가에는 피로가 진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차는 캠퍼스를 벗어나 큰길로 접어들었다.




익숙한 길 익숙한 신호. 그리고 익숙하게 도착한 작은 한의원 간판.




도심 외곽 오래된 주택가 골목 안.




한의원 앞에 차를 세우고 문을 열자 따뜻한 약탕 냄새가 은은히 코를 찔렀다.




"왔나?"




진료실 안에서 한의사 황규태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승호는 말없이 웃으며 문을 닫고 진맥 침상에 천천히 앉았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어깨가 조금 무너져 내려앉았다.




규태는 아무 말 없이 승호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시작했다.




잠시 뒤 이마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손끝에 닿는 맥은 들쭉날쭉했고 하초 쪽 열기와 기혈 소모가 심하게 불균형했다.




심장 맥은 가볍고 신장의 맥은 허했으며 간맥은 자주 고갈의 흔적을 드러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진맥 중이던 손을 천천히 거두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은 짧지 않았다.




그는 손등을 가볍게 쓸며 마치 맥이 아직 손끝에 남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승호를 다시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냥 넘기면 안 되겠군."




승호는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고 있었고 두 눈은 어딘가 멍하게 초점을 잃고 있었다.




규태는 입을 굳게 다물다 결국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꺼냈다.




"자네 혹시 젊은 여자하고 연애라도 하나?"




승호의 눈이 작게 떨렸다. 표정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미세한 떨림이 곧 그의 전신에 퍼졌다.




"무슨 헛소릴 하나?"




규태는 웃지도 않았다.




"아니야. 맥이 거짓말 안 하네. 이것은 단순한 허약이 아니야. 주기적으로 그마저도 짧은 주기로 상당량의 정이 빠지고 있어."




그는 손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감정 없는 소모가 아니라 몸 깊숙이서 계속 무언가를 퍼주는 맥이야. 더 퍼내면 무너진다네."




말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오래 삼켜온 불안이 있었다.




승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말이 가슴 안에서 물결처럼 일렁였다.




떠오른 것은 지원의 몸 안에 자신의 것을 쏟아 넣던 순간들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정액을 흘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안쪽에서 무언가가 뜯겨 나가는 느낌을 받았었다.




허벅지가 뻣뻣하게 당겨지고 갈비뼈 안쪽까지 말라붙으며 정말이지 온몸의 핏줄 하나하나가 가늘어지며 쥐어짜지는 감각이었다.




사정이 끝나는 그 순간, 그는 몇 초간 세상과의 연결이 끊기는 느낌을 받았다.




심장 소리도 멈춘 것 같고 눈꺼풀 뒤로 빛이 빠져나가며 자신의 온기가 누군가에게 완전히 옮겨가는 기묘한 이동의 감각.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통째로 이식해주는 행위 같았다.




손끝 발끝 정수리까지 한 방울도 남지 않은 감각.




그의 몸은 더 이상 채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 내주는 구조로 바뀌어 있었다.




규태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 맥은 오래 못 가."




말은 짧았지만 그 말이 닿은 곳은 승호의 맥이 아니라 그의 마지막 남은 내부였다.




규태는 의자에 앉은 채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말 잘 들어. 지금 자네 상태는..."




그는 말끝을 잠시 머금고 숨을 고르듯 가슴을 들어올렸다.




"생명의 절반이 이미 빠져나간 상태야."




승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은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진심으로 말하네. 이것은 그냥 과로가 아니야. 이대로 몇 번만 더 반복되면 심장 쪽이 먼저 멈출 수도 있어."




말은 단호했다. 친구로서, 그리고 한의사로서 더 이상 미뤄둘 수 없다는 절박함이 실려 있었다.




"그만해야 해. 뭔지는 묻지 않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단하라고. 이것은 경고가 아니라 마지막 충고야."




승호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어느 순간 입술이 말라 있었고 눈가에는 얇은 주름이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알겠네."




목소리는 낮고 짧았다. 이해했다는 듯 수긍한 듯.




그러나 그 말에는 결심도 없고 반발도 없었다.




그저 "예"라고 말하는 사람의 태도. 마치 이미 마음속에서 다른 답을 정해놓은 사람처럼.




규태는 그 침묵을 알아챘다. 그러나 더는 묻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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