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녀경 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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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장]
지원은 거실 소파에 몸을 눕혔다. 무릎은 자연스럽게 구부러졌고 한 팔은 이마 위에 얹혔다.
테이블 위에는 커피잔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주방 쪽에는 아직 끓인 물의 김이 잔뜩 맺힌 전기 주전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짐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벽 옆에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에는 아직 일본 여관의 스티커가 붙은 이름표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방 안 어디도 정리되지 않았고 그녀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자마자 머릿속은 다시 살아났다.
처음 그 연구실에 지원서를 넣던 날 머뭇거렸던 손끝. 정말 괜찮은 일인지 과연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 자필로 동의서를 적어내던 기억.
처음 알몸으로 체위 자세를 맞췄을 때 온몸을 에워쌌던 이질감. 전혀 다른 온도와 감촉.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그 접촉이 생물학이 아니라 감정처럼 느껴졌던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실증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격하게 오르가즘에 휩싸였던 기억.
그 순간의 수치심과 당혹감. 그리고 부정할 수 없었던 쾌감.
그것은 단순히 자극이 아니라 무너짐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그날 이후 다음 실증이 오히려 두려워졌다.
일정표가 다가올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연구 대상이 아닌 관계처럼 느껴지는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승호가 마른기침을 하던 그의 모습.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그 눈빛.
홀로 버텨온 사람이 잠시 벗어놓은 고요한 외로움이 거기 있었다. 그 모습은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애틋했다.
그리고 일본.
계곡 옆 눈밭에서 유키를 만들던 날. 정성스럽게 만든 눈사람을 옆에서 바라보던 승호의 시선.
웃지도 않았지만 따뜻했고 조용히 지켜봐주는 눈빛.
그 눈빛은 마치 오랜 시간을 건너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처럼 깊었다.
노천 온천에서 나란히 앉아 풍경을 바라보며 한시를 주고받았던 밤.
그때의 그는 한 사람의 연인이었고 스승도 학자도 실증 대상도 아니었다. 그냥 자신과 마주 앉은 같은 온도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밤.
"저는 진짜 하고 싶었어요."
그 고백 뒤에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정적. 그런데 이불 속에서 조용히 다가와 자신을 안아주던 그의 팔.
그 품은 따뜻했다. 너무 조용해서 그래서 더 진심 같았다.
그리고 소문.
몸속을 훑고 지나간 수치심과 충격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조롱의 시선들.
한 달 전부터 조금씩 이상했던 시선과 침묵들이 하나둘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그것은 분명 현실이었고 이제는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승호였다.
그의 눈빛. 그의 숨결. 실증실의 조용한 공기 속에서 묵묵히 내던 그의 말들.
그리고 일본 여행 마지막 날 자신과 함께 유키 옆에 서서 아무 말 없이 하늘을 함께 보던 모습.
지원은 눈을 감았다. 감정을 정리할 수 없었다. 그냥 조용히 소파의 천으로 몸을 묻었다.
[제58장]
소파 위에 누운 채 지원은 천장을 바라봤다. 몸은 지쳐 있었지만 머릿속은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결국 가장 단순한 논리로 되돌아간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어차피 처음부터 영화 촬영을 위한 연기잖아."
그 목소리는 아주 낮고 건조했다. 마치 납득시켜야 할 대상이 자신 말고는 없는 사람처럼.
"나는 배우고 백 교수님은 감독이고 우리는 러브 씬 작업 중이잖아. 그날의 내 눈물도 다 메소드 연기였어."
말끝이 허공에 스며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처음 계약서에 서명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책상 위에 펼쳐진 협약서. 월 150만 원의 연구비와 등록금 전액 지원.
돌아갈 때마다 조용히 건네지던 봉투. 교통비 명목. 한 번도 누락된 적 없던 그 정확함.
그리고 일본.
호텔 예약 항공권 온천 다다미방 눈 내리던 마을. 눈사람 유키.
그 모든 여정에 그녀가 준비한 것은 단 하나 동행뿐이었다.
모든 것은 준비돼 있었고 그녀는 그 흐름 속에 타이밍에 맞춰 움직였다.
그녀는 눈꺼풀을 내렸다.
메소드 연기. 감정 몰입.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승호의 손길. 그의 숨결. 일본의 밤. 눈사람 유키. 기준의 말. 그리고 퍼져나가는 소문.
그 모든 감정이 그녀의 안에서 서로를 밀쳐내고 부딪히고 방향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혼란을 더는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 그 감정들이 진짜든 아니든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전부 다 연기야. 전부 다..."
속삭이듯 뱉은 말은 고백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격해지던 숨도, 저릿하던 가슴도, 뜨거웠던 그 모든 순간도 모두 감정을 불러오기 위한 하나의 기법.
시나리오에 따른 감정 몰입.
그 이상은 아니라는 듯 그렇게 밀어냈다.
"난 배우니까."
다시 말한 그 한마디는 자조처럼 흘러나왔지만 그 말에 따라붙는 현실은 명확했다.
"생활비가 필요해. 등록금도 필요해. 방세도 필요해..."
그래서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만둘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공허한 천장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끝까지 가. 어차피 시작했잖아. 마무리까지..."
실증이라는 이름의 장면. 기록이라는 대본. 그리고 연기라는 정체성.
그녀는 이제 다시 연기에 복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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