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녀경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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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장]
지원은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더 이상 문자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녀의 뇌리에는 처음 계약서에 서명하던 그날의 차가운 공기와 종이의 감촉과 승호가 조용히 물었던 "정말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어렴풋이 되살아났다.
그때 그녀는 겨울 코트 안에 단정한 스웨터 차림으로 앉아 있었고 무릎 위로 손가락을 꼭 움켜쥔 채 "이것은 단지 견뎌야 할 고통"이라 다짐하고 있었다.
이후 실증 첫날, 침실의 불빛은 낮았고 실내는 지나치게 따뜻했다.
그 속살에 스친 낯선 노인의 손길. 승호의 호흡과 눈빛. 그리고 체위가 전환될 때마다 몸을 따라 움직이던 손가락의 압력.
실증이 끝난 그날밤, 그녀는 화장실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토했다. 거울 속 얼굴은 화장기 하나 없었고 눈물과 콧물이 뒤엉켜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뒤로 "나는 배우다. 메소드 연기일 뿐이다."라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며 그 모든 모욕을 견뎌냈다.
그러나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지금도 그 감각은 그녀의 피부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단지 묻고 억누르고 견뎠을 뿐.
그렇게 수많은 실증이 반복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바뀌었다. 누군가는 그녀를 의심했고 누군가는 멀리했으며 누군가는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연구비 때문에 몸을 판다"는 속삭임이 복도 끝을 돌 때마다 귀에 들리는 듯했고 지도 교수의 방에서 나올 때마다 누군가의 시선이 목덜미에 박혀드는 듯한 감각을 느껴야 했다.
그 모든 기억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인정이라는 이름으로 보상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꺼번에 되살아나 그녀의 안쪽을 조용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입술이 흔들렸고 손등 위로 한 줄 눈물이 흘렀다. 이제는 참으려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이 모든 일이..."
승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조용히 포갰다.
"고생 많았다. 그동안 정말 수고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지만 그 속에는 어떤 설명보다 분명한 위로가 담겨 있었다.
지원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 눈물 속에는 더 이상 수치심도 두려움도 없었다.
지원의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고여 있었으나 그 표정은 분명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진심으로 기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말없이도 가득 찬 표정.
승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기쁨은 분명 그의 심장을 가볍게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문득 서늘한 바람 같은 아쉬움이 일어났다.
"이 감정이 실증의 마지막 장면 위에서 피어난 것이었더라면..."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왠지 모를 허전함이 가슴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아직도 두 개의 실증이 남아 있다. 풍접화심•봉래역주.
특히, 가장 난해하고 가장 밀착되는 구조의 봉래역주 체위.
그는 자신이 앞으로 그 실증을 "연구자"로서만 견딜 수 있을지 솔직히 확신할 수 없었다.
한두 번의 실증에서 지원이 흘리는 미세한 숨결과 손끝에 닿는 체온과 절정 직전의 흔들림을 볼 때마다 그는 단 한 번도 완전히 이성을 지켜낸 적이 없었다.
그는 그것을 자신도 안다. 그 나약함과 그 본능.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는 불쾌한 안도감과 더불어 찾아오는 자책감까지.
"저 아이가 지금의 나를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애써 외면해 왔고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덮어왔으며 지원의 자발성과 연구 성과라는 껍질을 입혀왔다.
그러나 그 껍질은 지원이 웃는 지금 이 순간, 오히려 더 선명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의 눈빛은 창밖을 향했다. 겨울 햇살은 옅었고 책상 위의 커피는 식어가고 있었다.
그는 문득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어디쯤에 서 있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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